6월 초하루 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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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경우스님 작성일11-07-05 12:38 조회4,285회 댓글4건본문
시선가는 곳곳 온 천지가 녹음이 짙푸른 계절입니다. 아무런 표정이 없던 겨울의 나무들을 생각하다 지금 이렇게 활짝 핀 잎들을 보고 있으니 생동감이 느껴서 참으로 좋습니다.
이 좋은날 우리 장경사 신도님들과 이렇게 함께 하는 법회자리를 매번 뜻깊게 생각합니다. 함께 할 수 있음에 늘 감사 기도드립니다.
사방이 푸르러 같은 듯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유심이 들여다보면 같은 나무라 해도 각각의 나무마다 조금씩 다른 빛깔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 나무의 진짜 빛깔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자기 특성을 지니고 있고, 그 특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화창한 봄에 복숭아꽃 빛깔이 너무도 좋아서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멀리서 보는 환상적인 느낌이 없어지거나, 이름 모를 꽃이 하늘거리는 모습이 참으로 이뻐 한 가지 꺽어다가 화병에 꽂아 볼까하고 하면 바람에 흔들리던 그때 모습이 아닙니다. 인간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까이에서 대해야 그 사람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가까이 대하면 실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때는 멀리서 바라보아야합니다. 더불어 그 사람만의 고유한 특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관계에 있어 처음 관계를 맺을 때는 배려하는 마음이 우러러 나와 새롭고 잘 지내다가도 가까이서 함께 생활하다보면 원만하게 지내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는 것을 봅니다.
꽃과 잎사귀가 펼쳐지는 이 눈부신 신록 앞에서 '사람도 꽃과 나무처럼 늘 새롭게 피어날 수는 없을까? 그렇다면 실망하는 일도 없을텐데‘하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묻습니다.
"살아가는 전 생애를 두고 제가 행할 수 있는 가르침을 한마디 내려주십시오."
스승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이다."
용서란 남의 허물을 감싸주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마음입니다. 또 너그러움이고 관용입니다. 이렇듯 용서는 삶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많은 감정들 중에서도 중요한 미덕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불자님께 배려와 이해를 통한 용서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저 자신을 포함해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크고 작은 허물이 있습니다. 허물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살아가면서 서로 서로 관계를 맺어갈 때 그 허물을 낱낱이 지적하면서 꾸짖으면 결코 좋은 관계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허물을 지적받고 질책 받는 사람은 그만큼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미리 알아야할 것은 선의의 충고와 꾸짖음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선의의 충고는 좋은 도반이 되는 인간 형성의 길에 유용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속한 그룹이 아니고, 뜻을 같이 하는 도반이 아니고 같은 회원이 아니다 해서 함부로 험담을 하거나 뒷담화를 하는 것은 참된 불자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중생이 가진 허물을 감싸주고 덮어주는 용기는 스스로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용서하는 마음은 나와 너 우리 불자님들의 마음속에 사랑과 이해의 통로를 열어 화합할 수 있는 열매를 맺게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수행처인 사찰은 물론 가정과 사회를 가릴 것 없이 용서의 미덕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남의 결점만을 들추는 사람은 상대가 지닌 또 다른 마음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다 결점 투성이 일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결점만을 이야기하고 전하다보면 좋은 점을 놓쳐 서로 화합할 수 있는 통로 역시 막히게 되어 버립니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에는 상대를 따뜻하게 보려는 온기가 감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아닌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결점이 눈에 뛸 때에는 그 시선을 돌려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는 그런 허물과 결점이 없는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배려와 이해 없이는 화합을 이룰 수 없습니다.
중생은 너나 할 것 없이 비슷비슷한 속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불자님들이 끊임없이 완전한 깨달음인 부처를 이루고자 정진하고 기도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법구경>에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남의 허물을 보지 말라.
남이 했든 말았든 상관하지 말라.
다만 너 자신이 저지른 허물과 게으름만을 보라.
한 제자가 스승에게 다시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참된 수행자가 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스승은 "진정으로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싶으면 언제 어디서나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물어라. 그리고 나 아닌 그 어떤 누구의 허물도 들추지 말라."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스승의 가르침입니다.
지나간 일을 다시 들추지 마십시오. 과거를 묻지 마십시오. 상처를 건드려 덧나게 하지 마십시오. 남의 허물을 말하지 마십시오, 도반이든 부모와 자식간이든 소중한 사랑하는 사람이든 이미 지나간 과거를 허물을 들추는 것은 상대에게나 본인에게 하나도 이롭지 않습니다.
배려하는 마음,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 바로 그 자리에 부처가 있습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부처와 보살들이 우리 불자님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것은 업입니다. 업이란 몸으로 행동하고 입으로 말하고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살다가 이 세상과 작별할 때 내 영혼의 그림자처럼 나를 따르는 것은 내가 살아온 삶의 자취이자 업입니다. 이 업은 수레바퀴 돌듯 한 생애에서 끝나지 않고 윤회를 합니다.
누군가와 업으로 맺혀있으면 마음이 편하지도 자유롭지도 못합니다.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고 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서로 서로의 관계가 투명하고 좋아야지 마음이 편합니다. 우리 육체는 소멸할지라도 우리영혼은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불생불멸이라 하였습니다. 본래 자리가 그런 것입니다. 늘 인연따라 새로운 몸을 받았다가 버리고 또 받을 뿐 입니다. 나무를 보십시오. 저 나무가 살만큼 살고 죽는다고 해서 그걸로 끝이 아닙니다. 씨앗이 떨어져서 새로운 나무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그렇습니다. 순간순간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늘 챙겨야 합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생의 종점에서 용서 못할 일은 없습니다. 날마다 좋은날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설령 눈으로 직접 본 것이 나와 다른 행동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처지에 서지 않고서는 상대를 바르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용서는 내 입장이 아니라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고 나면 그 문으로는 무엇이든 다 드나들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용서를 통해서 인간됨이 형성되고 또한 사람의 그릇이 커지고 성숙해가는 것입니다.
혹여 지금 여기 오신 분들 중에 만약 누군가와 맺힌 것이 있는 분이 있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제 이야기를 들은 인연으로 모두 풀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이 눈부신 날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살아야 합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성불하십시오.
오늘 같이 좋은날 선시하나 선물하겠습니다.
<숨긴 것이 아니오>
단하자순
싹트지 않은 흰 연뿌리는
숨긴 것이 아니오
물 위에 붉게 핀 꽃은
드러난 것이 아니다
노닐며 지나가는 이들에게
말해 줄 것이 없으니
절로 맑은 저 바람이
향기 멀리 전하리
불기2555년 7월 일
장경사주지 경우
<참고>
'숨긴 것이 아니오'는 <선문염송>에 실린 게송이며, 단하자순(1604-1117)은 송나라 조동종 스님으로 스물일곱에 구족계를 받고, 진여모철ㆍ늑담극문ㆍ대홍법은 등에게 참구한 후, 대양산 부용도해의 법을 이음. 숭녕3년(1104) 남양의 단하산에 머물렀고, 그 후 당주의 대승산ㆍ대홍산에 머물며 선풍을 진작. 정화7년 3월 11일에 입적했다.
이 좋은날 우리 장경사 신도님들과 이렇게 함께 하는 법회자리를 매번 뜻깊게 생각합니다. 함께 할 수 있음에 늘 감사 기도드립니다.
사방이 푸르러 같은 듯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유심이 들여다보면 같은 나무라 해도 각각의 나무마다 조금씩 다른 빛깔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 나무의 진짜 빛깔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자기 특성을 지니고 있고, 그 특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화창한 봄에 복숭아꽃 빛깔이 너무도 좋아서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멀리서 보는 환상적인 느낌이 없어지거나, 이름 모를 꽃이 하늘거리는 모습이 참으로 이뻐 한 가지 꺽어다가 화병에 꽂아 볼까하고 하면 바람에 흔들리던 그때 모습이 아닙니다. 인간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까이에서 대해야 그 사람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가까이 대하면 실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때는 멀리서 바라보아야합니다. 더불어 그 사람만의 고유한 특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관계에 있어 처음 관계를 맺을 때는 배려하는 마음이 우러러 나와 새롭고 잘 지내다가도 가까이서 함께 생활하다보면 원만하게 지내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는 것을 봅니다.
꽃과 잎사귀가 펼쳐지는 이 눈부신 신록 앞에서 '사람도 꽃과 나무처럼 늘 새롭게 피어날 수는 없을까? 그렇다면 실망하는 일도 없을텐데‘하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묻습니다.
"살아가는 전 생애를 두고 제가 행할 수 있는 가르침을 한마디 내려주십시오."
스승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이다."
용서란 남의 허물을 감싸주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마음입니다. 또 너그러움이고 관용입니다. 이렇듯 용서는 삶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많은 감정들 중에서도 중요한 미덕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불자님께 배려와 이해를 통한 용서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저 자신을 포함해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크고 작은 허물이 있습니다. 허물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살아가면서 서로 서로 관계를 맺어갈 때 그 허물을 낱낱이 지적하면서 꾸짖으면 결코 좋은 관계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허물을 지적받고 질책 받는 사람은 그만큼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미리 알아야할 것은 선의의 충고와 꾸짖음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선의의 충고는 좋은 도반이 되는 인간 형성의 길에 유용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속한 그룹이 아니고, 뜻을 같이 하는 도반이 아니고 같은 회원이 아니다 해서 함부로 험담을 하거나 뒷담화를 하는 것은 참된 불자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중생이 가진 허물을 감싸주고 덮어주는 용기는 스스로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용서하는 마음은 나와 너 우리 불자님들의 마음속에 사랑과 이해의 통로를 열어 화합할 수 있는 열매를 맺게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수행처인 사찰은 물론 가정과 사회를 가릴 것 없이 용서의 미덕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남의 결점만을 들추는 사람은 상대가 지닌 또 다른 마음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다 결점 투성이 일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결점만을 이야기하고 전하다보면 좋은 점을 놓쳐 서로 화합할 수 있는 통로 역시 막히게 되어 버립니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에는 상대를 따뜻하게 보려는 온기가 감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아닌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결점이 눈에 뛸 때에는 그 시선을 돌려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는 그런 허물과 결점이 없는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배려와 이해 없이는 화합을 이룰 수 없습니다.
중생은 너나 할 것 없이 비슷비슷한 속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불자님들이 끊임없이 완전한 깨달음인 부처를 이루고자 정진하고 기도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법구경>에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남의 허물을 보지 말라.
남이 했든 말았든 상관하지 말라.
다만 너 자신이 저지른 허물과 게으름만을 보라.
한 제자가 스승에게 다시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참된 수행자가 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스승은 "진정으로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싶으면 언제 어디서나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물어라. 그리고 나 아닌 그 어떤 누구의 허물도 들추지 말라."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스승의 가르침입니다.
지나간 일을 다시 들추지 마십시오. 과거를 묻지 마십시오. 상처를 건드려 덧나게 하지 마십시오. 남의 허물을 말하지 마십시오, 도반이든 부모와 자식간이든 소중한 사랑하는 사람이든 이미 지나간 과거를 허물을 들추는 것은 상대에게나 본인에게 하나도 이롭지 않습니다.
배려하는 마음,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 바로 그 자리에 부처가 있습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부처와 보살들이 우리 불자님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것은 업입니다. 업이란 몸으로 행동하고 입으로 말하고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살다가 이 세상과 작별할 때 내 영혼의 그림자처럼 나를 따르는 것은 내가 살아온 삶의 자취이자 업입니다. 이 업은 수레바퀴 돌듯 한 생애에서 끝나지 않고 윤회를 합니다.
누군가와 업으로 맺혀있으면 마음이 편하지도 자유롭지도 못합니다.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고 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서로 서로의 관계가 투명하고 좋아야지 마음이 편합니다. 우리 육체는 소멸할지라도 우리영혼은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불생불멸이라 하였습니다. 본래 자리가 그런 것입니다. 늘 인연따라 새로운 몸을 받았다가 버리고 또 받을 뿐 입니다. 나무를 보십시오. 저 나무가 살만큼 살고 죽는다고 해서 그걸로 끝이 아닙니다. 씨앗이 떨어져서 새로운 나무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그렇습니다. 순간순간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늘 챙겨야 합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생의 종점에서 용서 못할 일은 없습니다. 날마다 좋은날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설령 눈으로 직접 본 것이 나와 다른 행동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처지에 서지 않고서는 상대를 바르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용서는 내 입장이 아니라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고 나면 그 문으로는 무엇이든 다 드나들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용서를 통해서 인간됨이 형성되고 또한 사람의 그릇이 커지고 성숙해가는 것입니다.
혹여 지금 여기 오신 분들 중에 만약 누군가와 맺힌 것이 있는 분이 있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제 이야기를 들은 인연으로 모두 풀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이 눈부신 날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살아야 합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성불하십시오.
오늘 같이 좋은날 선시하나 선물하겠습니다.
<숨긴 것이 아니오>
단하자순
싹트지 않은 흰 연뿌리는
숨긴 것이 아니오
물 위에 붉게 핀 꽃은
드러난 것이 아니다
노닐며 지나가는 이들에게
말해 줄 것이 없으니
절로 맑은 저 바람이
향기 멀리 전하리
불기2555년 7월 일
장경사주지 경우
<참고>
'숨긴 것이 아니오'는 <선문염송>에 실린 게송이며, 단하자순(1604-1117)은 송나라 조동종 스님으로 스물일곱에 구족계를 받고, 진여모철ㆍ늑담극문ㆍ대홍법은 등에게 참구한 후, 대양산 부용도해의 법을 이음. 숭녕3년(1104) 남양의 단하산에 머물렀고, 그 후 당주의 대승산ㆍ대홍산에 머물며 선풍을 진작. 정화7년 3월 11일에 입적했다.
댓글목록
박정호님의 댓글
박정호 작성일남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부처님의 말씀 감사합니다.
수현님의 댓글
수현 작성일너무 가까웁기에 다툼이 납니다. 너무 관심이 많기에 미움도 생깁니다. 너무 헌신하기에 아픔을 느낍니다. 모든것을 한발짝만 멀리에서 볼수만 있다면.... 부처님 말씀을 따르려 정진합니다
수현님의 댓글
수현 작성일스님! 감사합니다(합장삼배)
양병권님의 댓글
양병권 작성일자연에 조화를 일깨워 내마음에 담을수있고 행 할수 있게 하여 주시니 감사합니